사도 바울은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 한 사람을 전도하여 신자가 되게 하는 것으로 그의 미션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신자다운 신자가 되어 주님 모시기에 성숙한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질 때까지는 그의 의무가 다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의 전파(설교), 가르침, 권면에는 오직 한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영혼들을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성숙한 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비로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자신의 힘을 다하여 수고했다. 한 마디로 이것이 생명을 키우는 목자의 자세이다. 이것이 바로 아기를 키워 인간다운 인간으로 세우기 위해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며 수고하는 모습이다.
주님은 오늘의 교회가 민족들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사람 키우는 작업은 고난의 과정이지만 이 고난 없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사람들은 세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성숙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보람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
미국 옐로우스톤 공원에는 라쥐 포올(로지 풀)이라는 특이한 상록수 종류의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한때 숲의 80%를 이 나무가 점유했다.이 소나무의 솔방울은 굳게 입을 다문 형상으로 닫힌 채 여러 해를 지나고 있었다.
식물학자들 가운데는 이 볼품없는 소나무를 용도 폐기하는 것이 자연 경관에 더 좋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이 나무들을 키우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원 관리자들은 이 볼품없는 나무들이 자연에 제공하는 신록의 생명력을 믿고 이 소나무들을 오히려 소중히 여겨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1988년 이 공원에 큰 산불이 일어나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면서 공원을 초토화했을 때 제일 먼저 자라난 것이 바로 라쥐 포올 상록수였다. 솔방울의 진액이 불로 녹아들면서 이 나무 씨앗들의 발아를 촉진시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을 견디고 살아남은 라쥐 포올 소나무는 산불의 강한 자극을 받고 입을 열어 아름답게 열린 솔방울로 폐허가 된 공원에 부활의 장식이 되어 주었다. 이 라쥐 포올 소나무 덕분에 옐로우스톤 공원은 재건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 소나무를 키워온 공원 관리자들은 그동안 생명의 가능성을 믿고 투자해 온 보람을 보상받는 기쁨을 누렸다.
고난의 산불조차 이들에게는 오히려 생명을 꽃피우는 기회요 축복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가정과 교회의 보람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대와 나라를 탓하기보다 민족을 복음으로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녀와 지도자를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키워내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그 과정이 지루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마침내 민족과 열방 가운데 예수 부활의 생명을 꽃피워 내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고난을 기쁨으로 감수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