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세번째 이유는 함께하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6)
바울 사도는 지금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위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함께하는 공동체 바로 교회 공동체로 말미암아 우리의 환난이 너희의 위로가 되고 너희의 구원이 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위로가 너희의 위로가 됨으로 우리가 함께 고난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함께 기쁨을 누리면 기쁨은 갑절이나 더해지고 함께 고난을 당하면 우리 고난의 무게는 한결 가볍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축복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주일예배 중심으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고난이 찾아올 때 제일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에서 당당하고 여유 있게 승리하는 성도들은 대부분 교회 공동체에 깊이 헌신하여 나눔의 지체로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레첸메이어’가 쓰고 ‘로버트 잉펜’이 그림을 그린 “부러진 부리”라는 꼬마 참새 이야기가 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참새가 어느 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야위고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랜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 자야 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짹’하고 대답한다.
그날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민족이 치유되고 변화되는 꿈을 꾼 것입니다.
여러분, 집을 떠난 나그네의 피곤함 그대로, 부러진 부리의 피 흘림과 아픔을 갖고 교회에 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의 공동체 안에서 인생의 새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상처를 치유 받고 그토록 사모하던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새 역사의 내일을 춤추며 꿈꾸게 될 것입니다.
--- 이동원 목사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2장 위로 공동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