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공동체의 기원은 안식이다. 안식일 성수 혹은 주일 성수야말로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역사는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제도와 맞서 싸워왔고 그 결과로 교회를 지켜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일주일의 하루를 직장이나 노동에서 면제받고 쉰다는 것과 안식일에 안식을 제대로 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교회는 안식일이나 주일에 교회에 나옴으로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여 가르쳐 왔지만 안식의 성경적인 의미 그리고 안식을 누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도대체 안식은 무엇인가? 안식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다면 ‘마음의 공간’ 혹은 ‘마음의 여유’라고 하겠다. 안식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것이다. 아니 마음의 공간 혹은 여유를 갖고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이다. 한 기독교 작가는 성경적 안식을 가리켜 ‘창조적인 괄호’, ‘창조적인 쉼표’라고 불렀다.
우리들 인생의 여정에는 쉼표가 필요하다. 여유가 필요하다. 이 여유가 인생을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일곱째 날 안식의 날을 복 주셨다고 기록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안식 곧 마음의 여유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여유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처음 안식일을 만드시고 쉬었던 하나님 자신의 모범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안식일의 여유, 왜 무엇 때문일까?
과거를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섯 날의 창조의 일을 다 마치시고 쉬셨다. 곧 완성하셨기 때문에 쉬셨다. 이 일곱 번째 날은 그가 성취하신 것들을 돌아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날이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단순히 실용주의적 관점뿐만 아니라 심미주의적 관점에서 지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보고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지으셨다.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마음의 여백 곧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다. 안식일은 바로 이런 여백을 위해 준비된 날이다.
노동은 인생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받드시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모든 직업의 성직사상과 근면한 노동정신, 금욕의 정신이 격려되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인 복지 사회를 만들었다고 막스 베버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 노동이 안식과 균형의 리듬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일 중독자가 되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가장 불쌍한 인생이 있다면 죽어라고 일하다가 죽어 버리는 사람이다. 노동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도 노동의 보람을 돌아보는 쉼표가 필요하다.
--- 이동원 목사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16장 안식 공동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