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읽은 책 가운데 당시에는 어렵고 재미없게 느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 의미가 되새겨지는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세르반데스가 쓴 ‘돈키호테’이고 또 하나는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이다.
돈키호테는 풍차를 괴물로 오해하여 공격하고, 뚱뚱한 여관집 여주인을 공주로 착각하고 구혼을 하는가 하면, 자기가 타고 다니는 늙은 말을 준마로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생을 걸고 우리의 에너지를 다하여 도전해 온 인생의 과제들이 어느 날 돌이켜 보니 바람 돌리는 풍차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운 동화 속의 여주인공 같았던 내 신부가 어느 날 꿈 깨고 보니 여관집 늙은 여주인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지칠 줄 모르는 준마로 간주했던 내 육체가 어느 날 신음하고 허덕대는 모습을 보니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실상 세르반데스는 제후와 기사도로 상징되는 중세기 유럽의 소위 권력의 허위와 기만을 패러디할 목적으로 이 이야기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카뮈의 시지프스는 이런 권력의 허위를 알고도 여전히 권력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을 그리고 있다. 한때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가 신들에게 반역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하데스 곧 명계에 떨어져 높은 산을 향하여 바위 돌을 굴려 올리는 벌을 받는다.
바위가 산꼭대기에 닿으려고 하면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또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린다. 카뮈는 이 성공할 수 없는 부조리한 시지프스의 실존에서 인생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생을 살며 경험하는 온갖 갈등의 근저에는 바로 이런 권력의 충동이 숨어 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경험하는 부부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갈등, 고부 갈등도 따지고 보면 누가 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권력 갈등의 현상들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경험하는 노사 갈등, 여야 갈등, 계층의 갈등, 남북 이데올로기의 갈등 등등 모두 권력 갈등 아닌 것이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었다. 주께서 십자가 지시기를 얼마 앞둔 시점에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다툼이 일어났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 중 라이벌이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서로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는 갈등이 빚어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갈등을 넘어서서 섬김의 삶을 살 것을 가르치신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제자들의 공동체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 이동원 목사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9장 섬김 공동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