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은 성도들이 은혜 공동체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일까요?
둘째, 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선행 가운데 살아감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필립 얀시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선행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아이큐 75의 우직한 저능아 검프, 아무것도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받은 그가 어느 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달린다. 그에게는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다. 그는 오직 제니 때문에 사랑 때문에 달린 것이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간증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이유는 그 은혜,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가 다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저앉을 때마다 조건 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 준 그분의 음성, 그리고 그의 사랑을 경험한 동료들의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포리스트, 런, 런, 런.(달려, 달려, 달려야 해.)
셋째, 미래에 대한 소망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다면 세상이 우리의 선의를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상처받고 좌절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을수록 더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함이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선행이어야 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미션을 주께서는 교회 공동체에 위임하셨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지칠 것이다. 우리의 못다 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못다 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그분을 온전히 닮은 자로 그분 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경건이시다. 우리의 행복이시다. 우리의 소망이시다. 그분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이시다.
--- 이동원 목사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13장 은혜 공동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