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인은 “현대인들은 필요한 다리는 놓지 않고 아직도 벽을 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래서 이 시대 곳곳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벽,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사이의 벽,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벽,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사이의 벽, 남북한 사이의 벽, 동서 편견의 지방색의 벽, 보수와 진보 사이의 벽, 아직도 견고하고 높은 벽들이 쌓아 올려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고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 최대의 욕은 할례 받지 못한 자라는 말이었다. 반면에 당시의 그리스 로마를 대표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유대인들은 야만인 중의 야만인이요 되도록이면 이 땅에서 멸종시켜야 할 인종이라고 믿은 소위 반유대정서가 이미 확고하게 팽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순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두껍고 견고한 벽을 무너뜨린 새 공동체가 탄생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은 신약교회 공동체였던 것이다.어느 날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란히 함께 앉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계층과 계층 사이에서 그리고 오늘 이 땅의 허리를 단절한 남북한 이데올로기 대립의 벽 사이에서 과연 다시 한 번 평화의 공동체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평화의 중보자로 쓰임을 받기 위해 할 일은 무엇인가?
평화의 주님을 영접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그는 평강의 왕이시다.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새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폐기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평화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먼저 할 일은 이 평화의 주님을 사람들이 영접하게 하는 일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이 세상에서 일어난 별난 일들을 기록한 백과사전에 의하면 영국 스코틀랜드에 살던 미혼 독신 노처녀 자매가 어느 날 우연히 삼위일체로 신학논쟁을 벌이다가 마음이 상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원룸 아파트 두 침대 사이에 선을 긋고 부엌도 화장실도 선을 긋고 그 이후 일체 대화를 나누지 않고 평생을 살다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
평생을 화해 못한 그들을 어떻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오늘 기독교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사람들이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만이라도 정말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면 이 세상을 바꾸는 기적이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남북의 갈등도 동서의 갈등도 예수께서 주님 되지 못한 때문이다. 그는 평화이시다. 당신이 먼저 평화의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사건의 시작이다.
--- 이동원 목사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15장 평화 공동체 중에서 |